[책]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로빈 스턴 (feat. 가스라이팅 대처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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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by 로빈 스턴 (지은이) / 신준영
최근 페미니즘과 미투 운동이 사회적으로 확산되면서 그루밍 성범죄, 데이트 폭력의 일환으로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되고 있다. 나아가 폭력의 정의와 범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더욱 민감해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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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어제 술자리에서 왜 걔랑 그렇게 오래 대화했어?"
"그래? 같이 담배 피우느라 5분 정도 나가 있었던 것 같은데."
"무슨! 너네 20분도 넘게 나가 있었어. 너 또 시간 감각이 없었구나. 내가 너네 얼마나 나가 있나 보려고 시간 재봤어."
"그렇게 오래됐어? 아니야. 잠깐 얘기하고 금방 들어왔어. 시간 감각이 없지 않았어."
"20분도 넘게 같이 있었다니깐. 둘이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한 거야? 걔랑 바람이라도 피울 거야?"
"별로 중요한 얘기 아니어서 기억이 안 나. 그런 거 아닌 거 알잖아."
"나한테 말 못 할 얘기라도 있는 거야? 왜 나를 바보로 만들어? 나를 우습게 봐서 그런 거군."
"아니라니깐? 그리고 잠깐 나갔다가 금방 들어 왔다니깐. 내가 왜 너한테 그러겠어. 나는 너를 우습게 보지 않아."
"걔 눈빛 못 봤어? 분명 너한테 작업 걸고 있었어. 야 너 그러고 다니는 거 다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다들 손가락질 해. 알기나 해?"
"그런 낌새는 전혀 없었어. 그런 게 정말 아니었는데 어떻게 하면 믿어줄래?"
"그런 게 아니면 무슨 말을 했는지 나한테 말 못할 게 뭐가 있지? 떳떳한데 숨기는 이유가 있어?"
(*책에 등장한 예시는 아니지만, 책의 내용을 참고하여 직접 구성해본 대화입니다. 책에는 더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상황에서의 실감 나는 대화가 담겨있습니다.)
너무 다정하고 스윗하고 로맨틱한, 모든 면에서 존경할 만한 완벽한 나의 연인이, 가끔 특정 상황에서 자꾸 시비를 건다거나,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우긴다거나, 끝나지 않는 말씨름을 하게 만든다거나, 자꾸만 고의로 논점을 이탈하며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면 이 책에 주목해야 한다.
"왜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을 떠나지 못하는 걸까?"
표지에 적힌 위 의문을 시작으로 이 책에서는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정서적 학대의 일종인 가스라이팅에 관해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가스라이팅의 뜻, 정의부터 시작해서 대처법, 스스로 관계를 자가 점검해볼 수 있는 간단한 테스트까지 제공하고 있다. 해당 이슈에 관심이 많았지만, 이토록 처음부터 끝까지 잘 정리된 책은 처음 보았다. 등장하는 사례나 분석도 단순 구색 맞추기나 겉핥기식이 아니라 굉장히 깊이 있는 연구로 보였고, 덕분에 읽으면서 많은 것을 얻어갈 수 있었다.
가스라이팅 뜻
책에서는 가스라이팅(The Gaslight Effect)을 정서적으로 누군가를 조종하는 행위라고 설명한다. 즉, 암암리에 행해지면서 상대방을 조종하는 특정한 형태의 정서적 학대를 뜻한다. 가해자를 신뢰하고 존경하는 피해자가 가해자의 이해와 사랑, 인정을 받고자 하는 소망 때문에 진실이 아닌 가해자의 말을 진실이라고 믿고 자신의 지각력과 판단력을 기꺼이 의심한다. 그리고 점차 자신을 의심하게 되며 가해자에게 의존하게 되어 개인의 장점을 잃어버리고, 착취 당하면서도 관계가 단절되는 것이 두려워 가해자의 학대나 폭력을 참아내게 된다. 강하고 독립적인 여성들도 물론 이런 관계를 경험할 수 있다. 이런 관계는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특정한 상황에서만 일어나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며 서로 가스라이팅을 하기도 하고, 연인 관계나 부모-자식 관계, 오랜 친구 관계뿐 아니라 상사-부하 직원 간에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책에서는 이런 가스라이팅을 1단계부터 3단계로 나누어 단계별로 증상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이러한 관계는 아닌 걸 맞다고 우기며 혼란스럽게 구는 가해자와 그런 가해자의 말을 믿고 싶어서 본인의 판단력을 의심하는 피해자가 만들어내는 것이므로, 가해자의 행동을 바꾸기는 어렵지만, 피해자가 다르게 행동함으로써 이런 관계에서 탈출할 수 있다. 또한 이 과정에서 피해자의 인식을 돕고 힘을 실어줄 수 있는 믿을 만한 주변 사람의 존재는 아주 중요하다. 이런 관계에 있는 피해자뿐 아니라 그런 피해자의 주변 사람까지도 이 책을 꼭 읽어봐야 하는 이유다.
책에는 현재 가스라이팅 상황인지 스스로 진단해볼 수 있는 간단한 체크리스트도 다양하게 실려있다. 간단한 진단을 위해 책에 실려 있는 몇 가지 증상을 뽑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가스라이팅 자가 진단 테스트
*책에서는 'Checklist - 위험을 알리는 신호'라고 표현되어 있고, 3장에 나온 내용입니다. 이 글에서는 그 중 임의로 몇 가지를 뽑았습니다.
1. 상대방과의 사이에 일어난 일을 자세히 기억하기 어렵다.
2. 속이 더부룩하거나 가슴이 조이거나 목이 붓거나, 소화가 안 되는 등의 신체적인 증상이 있다.
3. 그가 전화하거나 집에 오면 공포감을 느끼거나 긴장이 된다.
4. 상대방과의 관계가 좋다고 스스로 다짐하거나 친구들에게 과장되게 이야기한다.
5. 자존심을 손상하는 대우를 내가 참는다고 느낀다.
6. 믿을 만한 친구가 자주 우려를 표시한다.
7. 친구를 회피하거나 상대방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피한다.
위 내용에 해당한다면 지금 가스라이팅 관계의 서막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가스라이팅 대처법
지금 속한 관계에서 위험 신호가 느껴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책에서 제시하는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간단하다. 친밀한 관계에 있는 그 상대방의 인정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이해하는 것이다. 위 사항은 말이 쉽지만 그게 바로 가장 어려운 점이기도 하다. Water is wet 같은 당연한 말일지도 모른다. 잘 수 없는 수험생이나 직장인에게 '졸리면 자면 된다'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게 안 되는 상황이 바로 가스라이팅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당 내용을 인식한 채 행동을 하나하나 수정하다 보면 목표에 점차 다가갈 수 있어 보인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제안하는 방법 중 가스라이팅 상황에서 사실관계가 명백한 일에 관해 불필요한 논쟁을 하지 않는 방법을 제안한다. '그건 니 생각이고' 하는 방법이다. 도입부의 예시처럼 늘 사실관계를 왜곡하면서까지 파트너를 의심하고, 이를 바탕으로 애인을 비난하는 경우가 잦다면, "나는 5분 정도 나가 있었고, 별것 아니었는데 우린 생각이 다르네." 하는 식으로 이미 자기가 확실하다고 믿는 걸 계속 논쟁할 논쟁거리로 만들지 않는 것이다. 가스라이팅 관계에서 이런 접근이 어려운 이유는 피해자가 가해자와 의견의 일치를 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가해자의 인정을 필요로 하고, 위 예시에서라면 가해자가 자신을 시간관념 없는 사람, 헤픈 사람으로 보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 그렇지 않다는 걸 설득하기 위해 가해자와 끝없이 말씨름하게 되고, 그러다 가해자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의심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 책에는 가스라이팅에 대처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이 하나씩 제시되어 있다. 피해자로서 사용해야 할 언어(문장)에 관한 세부적인 내용과 풍부한 사례가 가득 담겨있어서 유용하게 사용될 것이다.
"가해자의 이해와 인정, 사랑을 받고자 하는 소망, 이 모든 것들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과 걱정에서 가스라이팅이 시작된다. 우리가 신뢰하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할 때, 특히 그 말속에 어느 정도 진실이 담겨 있다면 그것을 불신하기는 힘들다." -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책 내용 일부 발췌
책에서 특별히 좋았던 점은 다음과 같다. 우선 이러한 역학 관계가 가해자와 피해자의 합작품이라는 점을 정확하게 지적하면서도 상황을 피해자의 탓으로 돌리지 않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며 서술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관계가 합작이기 때문에 열쇠가 피해자에게 있다는 점을 명시하며 피해자를 임파워링한다. 또한, 연인 관계뿐 아니라 부모나 직장 상사의 가스라이팅에 관한 다양한 사례도 함께 제시되어 있어 비슷한 상황에 놓였던 관계를 스스로 떠올려보며 현재 삶의 다양한 관계를 한 번쯤 점검해볼 수 있다. 그리고 가스라이팅 관계에서 벗어난 삶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도 서술하여서 용기와 희망을 준다. 마지막으로 이런 가스라이팅 관계에서 관계를 단절시키는 해법뿐 아니라 관계를 유지하면서 개선하는 방안도 제시한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사실 이 부분이 가장 고무적이었는데, 가스라이팅 관계를 발견했을 때 이를 단절하는 건 오히려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 관계가 단절하기 어려운 관계거나 소중한 관계라면 유지하면서 개선하는 방안을 고민해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모든 관계는 완벽하지 않고 고유의 결함이 있다. 나는 그 어떤 관계도 섣불리 단절하기보다는 함께 논의하며 개선하는 편이고, 가스라이팅이 결부된 관계여도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가스라이팅에는 피해자도 분명히 일조한다. 내 말은 이 상황이 피해자의 탓이라는 게 아니라 취약한 피해자를 조종하여 이익을 취하려는 가해자의 탓이 명백하지만, 의존적인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관계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 있고, 나 또한 어느 정도 그런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히려 그 관계를 단절하고 비슷하지만 새로운 또 다른 관계로 옮겨 간다고 해도, 근본적인 변화가 아니라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피해자가 충분히 강인하고 자신의 내면과 나를 둘러싼 삶에 변화를 이끌 준비가 되었다면 오히려 문제를 근본적으로 개선하기 위해서는 실제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 안에서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 진정한 극복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정립된 관계를 바꾸는 것은 어쩌면 관계를 단절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고, 결국 다시 가스라이팅 상황으로 빠져들 위험이 있다. 물론 고통받고 있는 피해자가 이런 짐을 짊어질 필요 없으며, 단순히 피해자는 그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쉽게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 이 또한 쉽지 않고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한다. - 당연히 가능한 선택지이며 존중과 지지를 받아야 할 일이다. 도리어 그 관계를 놓고 싶지 않은 마음에, 유지하면서 개선하는 방법을 택하겠다고 변명하는 것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어떤 방법을 택하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건강과 행복이며, 자아를 회복하여 자유와 즐거움을 누리면서 일상을 계속 살아가는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자.
*참고 - 이 주제에 관심이 많다면 아래 링크에서 관계 폭력 및 정서적 학대에 관한 다른 글을 볼 수 있다.
"언제나 잘못은 나에게만 있는 게 당연했다. 내가 그의 몫까지 변명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게 전쟁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더 이해하려 노력했다. 전쟁이었다면 늘 먼저 패배를 자처한 것과 다름없었다. 관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의 원인과 책임은 늘 나에게 있었고, 나는 매번 자책하며 괴로워했다."
https://thepin.ch/think/pbfi3q/violence-named-love
사랑, 그 따뜻했던 폭력
젠더 권력이 없는 연애에서도 관계 폭력은 일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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